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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주의자 수기 ·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6 · 12분 읽기 · 2026.10.05

흔들림은 굴뚝을, 불은 도시를 무너뜨린 사흘, 1906년 샌프란시스코

1906년 4월 18일 새벽 샌프란시스코를 흔든 지진보다 큰 피해를 낸 것은 그 뒤 사흘 동안 번진 불이었습니다. 일흔을 넘긴 사업가 제임스 스테트슨이 그해 6월에 적은 회고를 원문 번역과 함께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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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의 기록입니다. 지금의 행동 지침이 아니라 역사 자료로 읽어 주세요. 저자가 군의 퇴거 명령을 어기고 집에 다시 들어간 대목이 있지만, 따라 할 일이 아닙니다.

새벽 5시 12분, 그리고 사흘의 불

미국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무렵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앞진이 왔고, 20~25초 뒤 본진이 터졌습니다. 강한 흔들림은 45~60초 이어졌습니다. USGS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지진의 규모를 7.9로 적습니다. 산안드레아스 단층의 북쪽 구간이 한꺼번에 미끄러진 지진이었습니다.

도시를 더 크게 무너뜨린 것은 그 뒤의 불이었습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지진으로 수도 본관과 가스 본관이 여러 곳에서 깨졌고, 새어 나온 가스가 불을 빠르게 퍼뜨렸고 물이 모자라 불을 끄기 어려웠다고 정리합니다.

USGS가 인용한 미국 해양대기청(NOAA) 보고서는 사흘 동안 이어진 불이 지진보다 훨씬 큰 피해를 냈다고 적습니다. 무너지거나 불탄 건물은 USGS 집계로 2만 8,188채, 브리태니커로 약 2만 8,000채입니다.

오래 인용된 사망자 수는 700명 안팎이었지만, 지금 USGS와 브리태니커는 모두 3,000명이 넘는다고 봅니다. 집을 잃은 사람은 USGS가 22만 5,000명, 브리태니커가 약 25만 명으로 적습니다.

이 글을 쓴 제임스 B. 스테트슨은 밴네스 거리 1801번지에 살던 샌프란시스코 사업가입니다. 출생 연도는 묘비 기록 1831년, 구텐베르크 목록 1832년으로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지진 때 일흔을 넘긴 나이였습니다.

회고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홀브룩·메릴·스테트슨 상회가 나오고,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케이블 철도에는 처음부터 관여했다고 적었습니다. 이 회고는 1906년 6월에 썼습니다. 이유는 서문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틀리는지 알기 때문에, 일이 생생할 때 적어 둔다는 것입니다.

그는 책 끝에서 사람들이 이 사흘 동안 시간과 날짜를 헤아리는 힘을 잃었고, 자신도 그때 메모하지 않았다면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집은 버텼고, 위에서 떨어진 것이 위험했다

스테트슨의 집은 지진을 견뎠습니다. 굴뚝 꼭대기가 모두 떨어져 하나는 16피트 떨어진 앞마당까지 날아갔고, 부엌 회반죽이 갈라졌고, 책장과 대리석상이 넘어졌습니다. 딸의 집에서는 방문이 뒤틀려 끼는 바람에 딸이 방에 갇혔다가 문을 부수고 나왔습니다. 그가 적은 집 안 피해는 대부분 넘어지고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가 확인했다며 덧붙인 이웃의 일화도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우유 통을 내놓으려고 5시에 일어난 한 부인은 침대로 돌아가기 전에 지진을 만났고, 무너진 굴뚝이 지붕과 천장을 뚫고 방금 떠난 침대 위로 떨어졌습니다. 한 철도 직원의 딸은 그날 밤 어머니 방에서 잤는데, 그녀의 침대는 굴뚝 벽돌에 덮였습니다.

또 다른 부부는 침대가 방 반대편까지 굴러간 사이, 침대가 있던 자리에 3톤이 넘는 굴뚝 잔해가 쌓였습니다.

오늘의 아파트에는 벽돌 굴뚝이 없지만 원리는 같습니다. 우리 재난편은 도쿄도 방재 가이드북을 근거로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사망자의 90% 이상이 집이 무너지거나 가구가 넘어져 숨졌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떨어지기 쉬운 물건을 고정하고, 무거운 물건은 높은 곳에 두지 않으라고 합니다.

딸이 갇힌 일도 재난편 3-2에 있습니다. 건물이 비틀리면 문틀이 뒤틀려 문이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이 멈추면 먼저 문을 엽니다.

불 앞에서 내린 선택들

그날 아침 8시 무렵 스테트슨은 불길이 300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건물 5층 사무실에 올라가 금고에서 집문서와 보험 증서를 꺼내 왔습니다. 그는 무사히 나왔지만, 5월 4일 허가를 받아 폐허에서 찾은 금고 안의 탈 것은 모두 숯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류 한 묶음을 위해 불똥이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거리를 뛰어 지난 셈입니다.

4월 19일 오후, 군은 밴네스 거리를 방화선으로 삼아 동쪽 편 집들에 불을 놓고 폭파했습니다. NPS 기록도 이날 군이 밴네스 거리를 따라 방화선을 만들었다고 적습니다. 4시 45분 스테트슨은 대검을 꽂은 군인에게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가파른 클레이 거리를 오르다 지쳐 문간에 앉았다가 총을 겨눈 군인에게 다시 쫓겨났고, 쫓겨난 지 55분 만에 열기에 경비병이 물러난 틈을 타 퇴거 명령을 어기고 집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것을 목숨을 크게 건 일이라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군인들이 총을 쏠까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그는 수도가 끊긴 집의 앞방과 뒷방에 물 양동이를 두고, 깃털 먼지떨이를 묶어 걸레를 만들어 작은 불에 대비했습니다. 밤 10시, 옆집 탑에 두 손바닥만 한 불이 붙자 10달러를 주겠다는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세 사람이 물통을 들고 올라가 몇 분 만에 껐습니다.

반대로 가까운 스프레클스 저택은 뒤 창문으로 옮겨붙은 불에 다 탔습니다. 그는 누군가 안에서 양동이 하나를 들고 지키고 있었다면 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우리 집에 옮기면, 우리 생각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해석입니다. 먼저 대피입니다. 스테트슨이 군의 퇴거 명령을 어기고 집에 숨어 들어간 일은 운이 따른 한 사람의 기록일 뿐, 따라 할 방법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목숨을 건 일이었다고 적었고, 스프레클스 저택을 두고 한 '양동이 하나면 끌 수 있었다'는 말도 주민을 모두 내보낸 거리에서 나온 아쉬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66조가 대피명령을 위반해 생긴 피해를 국고 지원에서 뺍니다. 재난편 14-1의 정리대로 대피하라는 안내가 오면 따르는 것이 몸과 재산을 함께 지키는 길입니다. 물건을 가지러 다시 들어가지 않는 것도 같은 원칙입니다.

불길이 300피트 앞까지 온 건물로 서류를 가지러 올라간 일은 오늘이라면 사본으로 풀 문제입니다. 재난편은 신분증과 계약서, 보험 서류의 사본을 따로 두고 원본과 사본의 위치를 적어 두라고 합니다.

다음은 고령 가족입니다. 일흔을 넘긴 그는 가파른 클레이 거리를 오르다 고프 거리를 100피트쯤 앞두고 문간에 주저앉았고, 놉 힐 언덕길에는 지친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재난편 15-1은 걸음이 느린 어르신이 있으면 온 가족의 이동이 그 속도로 내려간다고 적습니다.

어르신이 있다면 그 걸음으로 대피 장소까지 시간을 다시 재고, 누가 모시고 나갈지 미리 정하고, 도와줄 사람을 두 명 정해 둡니다. 스테트슨의 가족도 목요일에 딸과 손주를 먼저 도시 밖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이미 도시에서는 휘발유 한 방울 구할 수 없었습니다.

지진 뒤의 불도 옮겨 봅니다. 1906년의 불은 깨진 가스관에서 새어 나온 가스를 타고 커졌고, 수도관까지 깨진 도시에서는 끌 물이 모자랐습니다. 재난편 3-2는 흔들림이 멈춘 뒤 가스와 전기를 끄고, 집을 떠날 때는 차단기를 내리고 밸브를 잠그라고 합니다.

불을 보면 먼저 "불이야"라고 외치고 작을 때 끄되, 천장까지 번졌으면 끄려 하지 않고 대피합니다. 스테트슨의 집에는 5월 1일에야 물이 다시 나왔고, 시는 굴뚝 점검 전까지 집 안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해 그는 5월 8일까지 길에서 밥을 지었습니다. 큰 지진 뒤 며칠은 물과 가스가 끊긴 채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은 소식입니다. 첫날 오후 전신국은 전보 접수를 멈췄고, 도시 밖으로 피한 딸은 23일 월요일에야 두 집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사이 팰리스 호텔에서 죽은 사람의 반지와 귀걸이를 떼어 나왔다는 이야기, 임시 병원에서 100명 넘게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스테트슨은 둘 다 사실이 아니었다고 적었습니다.

재난편 3-2가 말하듯 지진 직후 가장 빨리 퍼지는 것은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전화가 막히면 문자를 먼저 보내고, 누구에게 먼저 연락해 어디서 만날지를 가족끼리 미리 정해 둡니다.

개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1. 떨어지기 쉬운 물건은 고정하고 무거운 물건은 높은 곳에 두지 않습니다. 흔들림이 멈추면 먼저 문을 열어 출구를 확보합니다.
  2. 흔들림이 멈춘 뒤 가스와 전기를 끄고, 집을 떠날 때는 전기 차단기를 내리고 가스 밸브를 잠급니다.
  3. 불을 보면 "불이야"라고 외쳐 알리고 작을 때 소화기로 끕니다. 불이 천장까지 번졌다면 끄려 하지 않고 대피합니다.
  4. 대피하라는 안내가 오면 따르고, 물건을 가지러 다시 들어가지 않습니다. 중요한 서류는 사본을 따로 두고 원본과 사본의 위치를 적어 둡니다.
  5. 어르신이 있는 집은 그 걸음으로 대피 시간을 다시 재고, 누가 모시고 나갈지와 도와줄 사람 두 명을 미리 정해 둡니다.
  6. 전화가 막히면 문자를 먼저 보내고, 소문 대신 공공기관 안내를 따릅니다. 누구에게 먼저 연락하고 어디서 만날지 가족끼리 정해 둡니다.

자료 받기·원문 보기

원문 번역

제임스 B. 스테트슨, 『San Francisco During the Eventful Days of April, 1906』(1906년 6월 집필) 가운데 4월 18일 새벽 지진부터 4월 20일 오전까지의 대목을 덜어 낸 곳 없이 원문 순서대로 생존주의 매거진 팀이 옮겼습니다. 소제목은 읽기 편하도록 생존주의 매거진 팀이 붙였습니다. 원서는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난 퍼블릭도메인 자료이며, 이어지는 복구 이야기와 이웃의 일화는 아래 원문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지진 시각을 5시 13분으로 적었고(미국지질조사국 기록은 5시 12분 무렵), 단위(피트·인치·마일)와 화폐(달러)는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옮긴 대목에 [비하 표현]으로 가릴 말은 없었고, 군인들의 거친 말과 저자의 불만 섞인 말투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4월 18일 수요일 새벽 5시 13분, 밴네스 거리 1801번지

1906년 4월 18일 아침 5시 13분, 밴네스 거리 1801번지 우리 집에서 나는 아주 심한 지진에 잠을 깼다. 흔들림이 어찌나 거셌던지 하마터면 침대 밖으로 내동댕이쳐질 뻔했다. 침실의 큰 책장이 넘어져 앞 유리가 깨지고 의자 두 개가 부서졌다. 다른 책장 하나는 방바닥을 가로질러 쓰러졌다. 샹들리에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산산조각이 나는 줄 알았다. 벽난로 선반과 탁자 위의 장식품이 떨어져 바닥에 깨진 도자기와 유리가 흩어졌다. 흔들림이 58초 동안 이어졌다고들 하지만, 내가 가늠하기로는 격렬한 부분은 12초쯤이었다.

흔들림이 끝나자마자 일어나 창가로 갔다. 거리의 공기가 하얀 먼지로 가득했다. 내 방에서 대각선 맞은편 모퉁이에 있는 세인트 루크 교회의 석조물이 떨어지면서 일어난 먼지였다.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에야 클라우스 스프레클스 씨 집과 교회가 입은 피해가 보였다. 스프레클스 저택의 굴뚝들은 사라졌고, 돌 난간과 조각 장식은 부서졌다. 교회의 지붕과 박공 끝, 장식 석조물이 떨어져 보도를 덮었고, 건물 옆으로 8~10피트 높이까지 쌓였다.

그 무렵 레이철과 노라가 내 방문을 두드리며 내가 살아 있느냐고 물었다. 문을 열자 둘이 들어왔다. 레이철은 몹시 겁에 질려 있었고, 노라는 방 안에 성수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퍼시픽 거리 1945번지 딸(윈슬로 부인)의 집으로 올라갔다. 딸과 아이들은 이웃들과 함께 거리에 나와 있었고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집에는 금이 꽤 많이 갔다. 딸은 방문이 뒤틀려 끼는 바람에 방 안에 갇혔고, 문을 부수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집 굴뚝도 무너졌고 값진 유리그릇과 도자기가 많이 깨졌다. 우리 집으로 돌아와 보니 굴뚝 꼭대기가 모두 무너졌고, 그중 하나는 건물에서 16피트 떨어진 앞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서재에는 금이 몇 군데 보였지만 내 방에는 없었고, 응접실과 식당에도 아주 조금뿐이었다. 그러나 부엌은 회반죽이 심하게 갈라지고 개수대 둘레의 타일이 떨어져 나갔다. 응접실에서는 「물에 뛰어드는 소녀」 대리석상이 받침대에서 떨어져 조각조각 났다. 식당의 유리그릇 진열장과 그 안의 물건은 멀쩡했고, 찬방에서도 도자기와 유리그릇은 아주 조금만 깨졌다. 시계들도 멈추지 않았다. 손님방 천장 속 수도관이 터져 물이 피해를 좀 냈다.

그다음 나는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철도의 동력소로 건너갔다. 굴뚝이 70피트쯤 비스듬히 지붕 위로 무너져 내렸고, 그중 6피트쯤은 말 두 마리가 있던 마구간 안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말에 닿지는 않았지만, 풀려나기 전까지 말들은 몹시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한 마리는 너무 놀라 그 뒤로 쓸모가 없어졌다. 우리는 그 말을 목초지에 풀어 두었는데, 말은 야위어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이것저것 꽤 흐트러졌지만 기관들은 멀쩡해 보였다. 야간 경비원은 떨어지는 벽돌과 회반죽에 둘러싸였는데도 다치지 않았다. 물 공급이 끊겼다는 말을 들었고, 나중에 지진으로 수도 본관이 깨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전 7시, 걸어서 시내로

그러고 나서 나는 걸어서 시내로 나섰다. 오전 7시쯤이었다. 어느 노선에서도 전차가 다니지 않았다. 보도는 여러 곳에서 솟아올랐고, 굴뚝은 무너졌고, 벽은 지진으로 갈라져 있었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과 그레이스 교회는 겉으로는 다친 데가 없어 보였고, 페어몬트 호텔도 그랬다. 캘리포니아 거리를 따라 놉 힐을 넘어 시내 상업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자, 도시 아래쪽에서 불이 열 군데에서 열두 군데쯤 보였다. 바람은 북서쪽에서 약하게 불었고, 연기는 거대한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그 연기 너머로 보이는 해는 커다란 구리 원반 같았다. 캘리포니아 거리와 몽고메리 거리가 만나는 곳에 이르자 캘리포니아 거리 아래쪽 양편이 온통 불타는 것 같았다. 그때는 도시 전체가 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도시에서 이제까지 수백 번 그랬듯이 불은 저절로 멈추거나 누군가가 멈추게 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나는 샌섬 거리를 따라 파인 거리까지 가서, 파인 거리를 따라 마켓 거리 쪽으로 내려갔다. 홀브룩·메릴·스테트슨 상회가 온통 불타고 있었다. 프런트 거리에 이르자 프런트 거리와 캘리포니아 거리 남동쪽 모퉁이의 커머셜 블록(5층에 내 사무실이 있었다)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 건물로 향했다. 그때 불은 캘리포니아 거리와 배터리 거리 남동쪽 모퉁이에서 맹렬히 타고 있었다.

오전 8시, 불길 300피트 앞의 금고

캘리포니아 거리 123번지 입구로 가니 관리인이 나오면서 5층에 불이 붙었으니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건물 안뜰로 불똥이 소나기처럼 떨어지고 있었지만 건물 안에는 연기가 없었다. 그래서 안에서 불이 난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5층 내 방에 올라가 보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옆 사무실인 아메리칸 비트 슈거 회사의 문을 열어 보니 열렸다. 그 방을 거쳐 내 방으로 들어갔다. 차양을 올리자 배터리 거리와 캘리포니아 거리에서 불길이 족히 75피트 높이로 타오르고 있었고, 나와의 거리는 300피트도 되지 않았다. 복도와 방들을 둘러보았지만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몇 분 동안은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금고를 열려고 다이얼을 돌리는 사이에 또 한 번 지진이 왔다.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끝까지 돌려서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지난 세월 동안 받은 기념품과 선물이 꽤 있었다. 이것들을 챙기고 집문서와 보험 증서, 그 밖의 서류까지 그러모으니 곧 두 팔이 가득 찼다. 벽장 위에 생선 바구니가 보여서 내려 이 자잘한 것들을 모두 담았다. 그다음 금고 구석의 작은 쇠 상자를 열었더니 동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날 그 안에 20달러 금화 네 닢을 넣어 둔 것이 생각났다. 바닥을 더듬어 두 닢을 주웠고, 더는 찾을 수 없어서 나머지는 금고 안에 남았으려니 했다. 나는 생선 바구니와 장부, 서류를 품에 안고 금고를 닫아 다이얼을 돌려 잠근 뒤 계단을 내려 거리로 나섰다. 올라갈 때도 안뜰에 불똥이 많았지만 내려올 때는 더 많았다.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그야말로 불보라였다. 캘리포니아 거리로 다시 나오니 공기가 온통 불똥과 연기 덩어리였고, 그것이 거리를 따라 선착장 쪽으로 불려 가고 있었다. 프런트 거리로 가려면 그 바람을 거슬러야 했다. 품에 안은 서류에 불이 붙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외투 단추를 채워 서류를 가리고, 모자를 눈 위까지 눌러쓰고, 캘리포니아 거리를 거슬러 뛰어들어 프런트 거리를 따라 처음 출발했던 파인 거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연기도 불도 없었다. 짐을 한가득 안고 걸어가다가 길에 떨어진 타자기 덮개를 보고 주웠다. 속이 비어 있기에 멈춰 서서 뒤집은 다음 짐을 그 안에 넣고 프런트 거리와 마켓 거리 쪽으로 향했다. 그때 그 모퉁이에서 한 블록 안에는 불이 없었다. 오전 8시쯤, 어쩌면 8시 30분쯤이었다. 마켓 거리 한가운데의 빈 상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W. R. 휘티어 씨가 지나가다가 짐 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짐을 유니언 트러스트 회사 입구까지 가져갔지만, 그들은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디어링 씨를 찾았더니 그가 짐을 받아 주었고, 우리는 함께 내려가 금고실 바깥문과 안쪽 문 사이에 넣어 두었다. (22일 뒤 나는 그 짐을 잊지 못할 4월 18일에 맡겼을 때와 똑같이 멀쩡한 상태로 돌려받았다.)

오전 10시 반, 임시 병원과 무너진 시청

다음으로 3번가에 올라가 보니 3번가와 미션 거리 모퉁이에서 불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마침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지나가기에 올라탔다. 아들은 미캐닉스 파빌리온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곳에 차린 임시 병원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했다. 파빌리온에 닿으니 안에 부상자가 200명이라고 했다. 이 시각에는 마켓 거리 남쪽 줄에서 프리몬트 거리 서쪽으로는 불탄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약국과 철물점을 돌며 더운물 주머니와 석유·알코올 풍로, 외과 기구를 구하러 다녔다. 구세군의 세라 프라이 양을 함께 태웠는데, 그녀는 기운차고 열성적이었다. 세인트 니컬러스 호텔 아래 약국에 닿자 그녀는 차에서 뛰어내렸고, 문이 잠겨 있자 의자를 집어 머리 위로 들어 유리문을 깨부순 뒤 더운물 주머니와 붕대, 임시 병원에 쓸 만한 것은 무엇이든 챙겼다. 나는 두어 시간 동안 해리와 함께 다녔다. 그러고는 마켓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그 시각인 오전 10시 30분에 불은 마켓 거리 남쪽에서 대략 5번가부터 10번가까지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나는 마켓 거리를 벗어나 골든게이트 애비뉴로 올라갔다. 하이드 거리와 골든게이트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서 지진으로 무너진 커다란 2층 집을 보았다. 문과 창문, 1층의 서 있던 부분이 모두 짓눌려 45도로 기울어 있었다. 잔해 더미 위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물어보니 "죽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하죠?"라고 했다. 시청은 심하게 부서졌다. 큰 금이 여기저기 보였고, 거대한 돔은 3분의 2쯤 무너져 내렸다. 한 번은 파크 응급 병원에도 다녀왔다. 11시에 나는 퍼시픽 유니언 클럽에 들어가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날 처음 입에 댄 음식이었다.

오후, "도시는 끝났다"

클럽에서 나와 보니 마켓 거리의 1번가와 2번가 사이에서 불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이 무렵 경찰관 하나가 내게, 시장이 오후 2시에 시민 회의를 소집했으니 법원 청사로 오라고 알려 주었다. J. E. 터커 씨를 만나 로타 분수 맞은편 마켓 거리 한가운데의 상자에 함께 앉아 사태를 의논했다. 우리는 이 도시가 파괴될 운명이며 우리로서는 도시를 구하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지만 구경만 할 뿐이었다. 넋이 나간 얼굴도 있었고, 몹시 흥분한 얼굴도 있었다. 샌섬 거리와 몽고메리 거리 사이의 부시 거리로 내려가 퍼스트 내셔널 은행의 머피 씨와 허먼 올리크스 씨를 만나, 불이 그의 건물까지 올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진으로 그 은행 건물의 무거운 화강암 처마 장식이 부시 거리 한가운데로 떨어져 있었다. 이때 머피 그랜트 상회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였다. 몽고메리 거리를 따라 캘리포니아 거리로 가 보니 불이 몽고메리 거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3시에 불은 팰리스 호텔의 미션 거리 쪽에 닿았고, 3시 30분에는 호텔이 제대로 타고 있었다. 이 무렵 웨스턴 유니언 전신국에 들어가 뉴욕으로 가는 길이던 넬리와 로버트에게 전보를 쓰고 있는데, 더는 전보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각 라파예트 광장과 프레시디오로 가는 길들은 트렁크와 여행 가방을 끌며 안전한 곳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개는 프레시디오에 자리를 잡았다.

밤, 불빛으로 책을 읽다

밤이 되자 불빛 때문에 낮처럼 밝아서, 집 안 어디서든 다른 불빛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저녁 8시에 사정을 보러 다시 시내로 갔다. 포스트 거리를 지나 그랜트 애비뉴로, 그다음 서터 거리로 가서 서터 거리를 따라 몽고메리 거리까지 내려갔다. 그때 불은 2번가 맞은편 마켓 거리의 옥시덴털 호텔 동쪽 절반과 포스털 전신회사 사무실, 그 옆 건물들을 태우고 있었다. 이 시각에 불은 우리 집에서 1과 4분의 1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릭 하우스와 프리메이슨 회관은 그때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그다음 파인 거리와 듀폰 거리로 가 보니, 그 자리에서 법원 청사와 그 일대의 건물이 모두 불타는 것이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그랜트 애비뉴와 커니 거리 사이 서터 거리의 골드버그 보언 상회가 가게에서 물건을 마차에 싣고 있었다. 아는 점원에게 말을 걸려고 들어가려다가, 내가 무엇을 훔치려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거만한 경찰관에게 험하게 쫓겨났다. 9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오니 서재에 윌콕스 씨와 그의 어머니, 롱스트리트 부인, 휘트니 박사 부부, 힉스 부인과 그 딸, 샐리, 루스, 마리 루이즈가 모여 있었다. 다들 몹시 불안해했다. 거리의 흥분한 군중에게서 들은 소식이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두 대와 윌콕스 씨의 마차가 밤새 집 앞에 대기했다. 마차 삯은 한 시간에 25달러였다. 나는 피곤해서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4월 19일 목요일 새벽 2시 반, 트렁크를 끄는 사람들

새벽 2시 30분까지 자고 일어나 사정을 보러 다시 시내로 나갔다. 캘리포니아 거리로, 그다음 하이드 거리로, 그다음 파인 거리로 갔다. 파인 거리와 레븐워스 거리에서 보니 그 시각 불은 오패럴 거리를 따라 존스 거리에서 메이슨 거리까지, 그리고 메이슨 거리 동쪽 편을 태우고 있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파인 거리와 메이슨 거리에서 캘리포니아 거리와 메이슨 거리의 페어몬트 호텔로 갔다. 그 두 거리 사이의 언덕은 매우 가팔랐다. 기진맥진한 많은 사람이 길바닥 포석 위와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불이 페어몬트 호텔을 넘어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텔의 앞쪽, 곧 동쪽 면과 다른 건물 사이에 수백 피트의 빈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은 새크라멘토 거리 쪽으로 호텔을 지나쳐 올라갔고, 결국 호텔이 불길의 바람 아래쪽에 놓이는 지점까지 갔다. 호텔은 아직 완공 전이었고, 북동쪽 구석에 니스와 기름을 쌓아 두고 있었다. 이것이 건물이 타는 것을 크게 부추겼다. 캘리포니아 거리와 메이슨 거리에서 보니 캘리포니아 거리와 듀폰 거리 모퉁이의 옛 세인트 메리 교회와, 캘리포니아 거리와 스톡턴 거리 모퉁이의 그레이스 대성당이 불타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차이나타운이 불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나는 캘리포니아 거리와 밴네스 거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두 거리 모두 남자와 여자, 아이들로 붐볐다. 보따리와 꾸러미, 유모차를 든 사람도 있었지만, 가장 흔한 방법은 트렁크를 끄는 것이었다. 트렁크가 보도에 긁히며 거칠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트렁크를 끌고 가는 한 남자를 따라잡았는데, 트렁크 위에 얹은 여행 가방이 자꾸 떨어졌다. 다가가서 한 손으로 여행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밧줄을 잡아 그가 무거운 트렁크 끄는 것을 도왔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니 그는 처음에 나를 여행 가방을 훔치려는 도둑으로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말을 붙였고, 나중에 그의 태도로 보아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몇 블록 뒤 내가 헤어질 때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밴네스 거리의 니커보커 호텔 앞을 지나다가 부인 몇 사람과 나이 지긋한 신사 한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몹시 흥분해서 개인 물건을 가지러 방으로 돌아갈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불이 적어도 다섯 시간 안에는 밴네스 거리에 닿지 않을 테니 원하는 만큼 몇 번이고 다녀와도 시간이 넉넉하다고 안심시켰다. 불은 열세 시간이 지나서야 그곳에 닿았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들을 진정시켰다고 생각한다.

새크라멘토 거리와 밴네스 거리에 이르렀을 때, 한 여자가 전차 선로에 걸린 트렁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빼내도록 도와주었다. 불이 번지는 속도로 보아 이곳에 닿으려면 여러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여기는 안전하니 무리하지 말고 자주 쉬어 가라고 일렀다.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그녀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아기와 새장을 든 남자와 여자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렬은 수요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목요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목요일, 딸과 손주를 도시 밖으로

목요일 이른 아침 윌콕스 씨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그리고 힉스 부인과 딸은 우리 집을 떠나 오클랜드로 건너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로스앤젤레스행 기차를 탔다. 휘트니 박사 부부는 친구 집으로 갔다. 이른 아침에 나는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동력소에 가서 해리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전차 20대를 밖으로 빼냈지만, 물이 끊겨 보일러 수위가 아주 낮아서 증기를 올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았고, 전차를 끌어낼 말도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차고 안의 전차와 거리에 있던 전차, 그중 몇 대는 여덟 블록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모두 52대가 전부 불탔다. 한 대도 남지 않았다. 나는 밴네스 거리 1801번지로 돌아왔다. 바람은 약했지만 북서쪽에서 불고 있었다. 오전 9시에 아들의 자동차에 내 옷과 은식기, 침구, 리넨을 실어 브로드웨이 2104번지 옥스너드 부인 집으로 보냈다. 10시 30분에는 양탄자와 몇 가지 다른 물건을 준비해 두었고, 아들이 그것을 프레시디오로 실어 갔다. 이 무렵부터 사정이 꽤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밴네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 창백하고 심각한 얼굴로 저마다 보따리를 지고 여행 가방이나 트렁크를 끌고 있었다.

우리는 윈슬로 부인과 아이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이 가장 낫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아들이 자동차로 그들을 벌링게임으로 데려갔다. 아들의 차에는 휘발유가 얼마 없어서,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올 만큼이 되는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도시에서는 단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었다. 워싱턴 스트리트 경찰서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가서 부탁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경찰에게 차를 징발당할 뻔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싣고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참이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차를 출발시켜 그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와서야 겨우 피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윈슬로 부인, 급히 챙긴 옷가지 몇 벌을 싣고, 아들은 이리저리 돌고 꺾어 가며 도시를 빠져나가 4시에 그들을 무사히 벌링게임에 내려 주었다. 클럽에는 묵을 자리가 없어서 그들은 로버트 콜먼 부부의 호의를 받아 천막에서 지냈고, 다음 날 아침(금요일) 윌 테비스 부부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부엌 굴뚝이 무너지지 않아 집 안에서 밥을 지을 수 있었고, 우물이 있어서 남자들이 펌프를 손보았다. 그래서 목욕이라는 호사까지 누렸다. 딸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 자기 집과 내 집이 틀림없이 불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도 전신도 우편도 없는 채로, 23일 월요일에 두 집이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애타는 시간을 보냈다.

목요일 오후, 창가에서 본 불의 줄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내 창문에서 클레이 거리의 존스 거리 쪽에 불길이 보였고, 남쪽으로는 서터 거리와 레븐워스 거리까지 보였다. 불은 3시가 넘어서야 이곳에 닿았는데도, 이 무렵 군인과 경찰은 포크 거리의 가게와 집에서 사람들을 몰아냈다. 존슨 상회 사람들도 쫓겨났고, 장부와 서류를 챙기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다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플레전턴 호텔이 이 무렵 불탔던 것 같다. 정오에는 존스 거리를 따라 클레이 거리부터 캘리포니아 거리까지 불길이 끊김 없이 이어졌다. 1시 30분에는 하이드 거리와 클레이 거리에 거의 닿았고, 그 지점부터 포크 거리와 서터 거리까지 이어졌다. 불길은 50~75피트 높이로 치솟았다. 2시 30분에는 하이드 거리와 워싱턴 거리 쪽에서 밴네스 거리로 다가오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서터 거리와 밴네스 거리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앞쪽 방에서 쌍안경으로, 내가 방금 말한 긴 불의 줄을 따라 집이 하나씩 불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둘기 떼가 안전한 곳을 찾아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것도 보았다. 밴네스 거리에 다가오면서도 불은 워싱턴 거리 북쪽은 태우지 않았다. 바람이 북서풍이었고 밴네스 거리의 폭이 125피트였으므로, 나는 불이 길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이 이렇게 타오르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산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타 없어지고 있을까? 불의 줄을 바라보며 한 시간에 백만 달러쯤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 문제에 대한 내 짐작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는 나중에 드러났다. 손실은 4억 달러로 추산되었고, 불이 탄 시간은 18일 오전 5시 15분부터 20일 오후 3시까지, 60시간쯤이었다. 그러면 한 시간에 650만 달러쯤 되는 셈이다.

오후 3시, 군인들이 밴네스 거리에 불을 놓다

3시에 군인들이 밴네스 거리 동쪽 편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것이라며 사람들을 밴네스 거리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 프랭클린 거리 쪽으로 몰아냈다. 나는 창문으로 소방대원과 폭파반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먼저 워싱턴 거리와 부시 거리 사이 밴네스 거리 동쪽 편의 집마다 불을 놓았고, 3시 30분에는 거의 모든 집이 불타고 있었다. 방법은 이랬다. 군인 하나가 과일 접시 같은 그릇에 불붙는 물질을 담아 들고 집에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 앞쪽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차양과 커튼을 끌어내린 다음, 그릇 안의 것에 불을 붙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양과 커튼이 활활 탄다. 불이 더디게 붙으면 창문에 벽돌과 돌을 던져 유리를 깨고 바람이 들게 했다. 건물 하나가 제대로 불붙는 데 20분쯤 걸렸다. 4시부터 4시 30분 사이에 세인트 루크 교회와 장로교회, 부시 거리부터 워싱턴 거리까지 밴네스 거리의 집들이 모두 불탔다. 이 무렵 그들은 다이너마이트 폭파를 시작했다. 그다음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불의 줄이 포크 거리에 있었으므로, 불길을 마주 나가 맞아서 밴네스 거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 때문에 두 거리 사이의 블록 전체가 한꺼번에 불타 엄청난 열이 났기 때문이다. 불이 포크 거리에서 밴네스 거리로 다가오도록 두었다면 열이 훨씬 덜했을 것이고, 밴네스 거리 서쪽 편에 불이 옮겨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은 우리 집에서 무섭게 느껴졌다. 두 블록 안에서 터지면 집이 심하게 덜컹거리고 흔들려 창문이 깨졌고, 동시에 도난 경보기가 울렸다. 창문이 깨질 때마다 차양과 커튼이 찢기고, 바닥은 유리로 덮이고, 벽에는 금이 갔다. 다 끝난 뒤에 보니 우리 집에서 판유리 12장과 유리 54장이 깨져 있었다. 한 장의 크기가 대략 30인치×50인치였다.

오후 4시 45분, "이 집에서 나가요!"

4시 45분에 나는 군인들에게 집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용한 방식이 아니라, 뜻을 잘못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의 명령이었다. 대략 이랬다. "이 집에서 나가!"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여긴 내 집이고, 내가 원하면 여기 있을 권리가 있소." "잔말 말고 빌어먹을, 당장 나가!" 그래서 총에 대검을 꽂은 군인 하나가 불길과 연기, 폭발 속에서 나를 클레이 거리를 따라 고프 거리까지 끌고 올라갔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기진맥진해서 고프 거리를 100피트쯤 앞두고 어느 집 문간 계단에 앉아 쉬었다.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길 건너편의 군인 하나가 총을 겨누며 외쳤다. "거기서 나와, 영감. 고프 거리로 올라가!" 그가 장전된 총을 들고 있었고 아주 당당해 보였으므로 나는 그 정중한 명령에 얼른 따랐다. 군인에게 끌려 마지못해 클레이 거리를 오르면서도, 장로교회 첨탑이 무너지는 것을 볼 만큼은 버티고 섰다. 나는 고프 거리에 한동안 머물며 우리 집을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집에서 불길이 솟아 나올 것만 같았다. 고프 거리에서 몹시 애태우며 지켜보다가, 집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집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열기가 너무 세서 경비병들도 밴네스 거리에서 물러나 있었다. 근처에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조용히 워싱턴 거리 북쪽 편을 따라 프랭클린 거리까지 내려갔다. 거기에도 아무도 없어서 계속 워싱턴 거리와 밴네스 거리까지 갔다. 외투 깃을 세우고 모자로 얼굴 옆을 가린 채 밴네스 거리를 따라 우리 집 현관까지 달려가, 5시 40분에 재빨리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55분 동안 밖에 있었던 셈이다. 옷이 몹시 뜨거워졌지만 그을리지는 않았다. 이것은 목숨을 크게 건 일이었다. 이 군인들은 잠깐 손에 쥔 권한 때문에 몹시 오만하고 거들먹거렸고, 조금만 거슬려도 망설임 없이 쏠 것 같아 두려웠다. 내 집에 들어가는 데 이런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나고 넌더리가 났다. 돌아와 보니 메릴 씨 집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고, 세인트 루크 교회와 제일장로교회 두 교회, 밴네스 거리와 캘리포니아 거리 모퉁이의 브래드버리 저택과 그 옆의 니커보커 호텔, 클레이 거리와 프랭클린 거리 모퉁이의 건 씨 집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시 집에 들어와 보니 새크라멘토 거리와 밴네스 거리 모퉁이의 노이슈타터 저택이 반쯤 타 버렸지만 스프레클스 저택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이때 두 번째로 폭파된 메릴 씨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고비를 넘겼다고 여겨도 되겠다고 느꼈다. 메릴 씨 집이 타더라도 밴네스 거리 서쪽 편까지 위험해지지는 않기를 바랐다.

목요일 밤, 양동이와 깃털 먼지떨이

그런데 이제 새로운 위험이 다가왔다. 하이드 거리에서 워싱턴 거리 북쪽 편부터 잭슨 거리 남쪽 편까지의 블록 줄이 불타고 있었고, 불길이 밴네스 거리 쪽으로 다가오며 길을 건너올 가능성이 있었다. 새크라멘토 거리의 스프레클스 마구간과 노이슈타터 저택 뒤의 집들도 이제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 클레이 거리에서 밴네스 거리와 프랭클린 거리 사이를 마주한 고로반 오두막 세 채와 다른 2층 집 두 채, 폭파된 건 씨 집에 불이 붙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앞 창문으로는 워싱턴 거리와 잭슨 거리 사이에서 밴네스 거리로 다가오는 불을 지켜보고, 뒤 창문으로 가서는 클레이 거리 쪽에서 오는 위험을 살폈다. 잭슨 거리와 밴네스 거리 모퉁이의 웬밴 저택은 6시 15분에 제대로 불이 붙었고, 6시 55분에 무너져 내렸다. 클레이 거리 쪽 위험은 저녁 7시 30분쯤 시작되었다. 8시 15분에는 내가 말한 그 전선 전체가 불타올라 최고조에 이르렀다. 창유리가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창문 하나를 열고 창틀 나무를 만져 보았더니 똑같이 뜨거웠다. 나는 앞방과 뒷방에 물 양동이를 두고, 깃털 먼지떨이를 묶어 만든 임시 걸레를 준비해, 손이 닿는 곳에 작은 불이 붙으면 끌 채비를 해 두었다. 한 시간 동안 사태를 지켜보았다. 불길이 조금 잦아들자 희망이 생겼고, 밤 10시에는 불이 밴네스 거리도, 클레이 거리도 건너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때 열기가 조금 가라앉아서 밖으로 나가 보았다. 클레이 거리에서 우리 집 바로 옆인 슈워배커 부인 집의 탑에서 내 두 손바닥만 한 작은 불이 막 붙고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제28 해안포병대의 제임스 월턴, 풀턴 거리 2176번지의 C. C. 존스, 오클랜드의 데이비드 밀러 퍼거슨이 있었다. 나는 올라가서 저 불을 꺼 주는 사람에게는 누구든 1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물통을 들고 그 집에 들어가 계단을 올라 창문을 열고 몇 분 만에 불을 껐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 했고, 군인은 다음 날 10달러를 받았다. 나중에 나는 그 잊지 못할 밤을 기억하도록 퍼거슨에게 금 성냥갑을 선물했다. 슈워배커 부인 집이 탔다면 그 블록 전체가 탔을 것이고, 불은 북쪽으로 건너가 퍼시픽 거리, 브로드웨이, 발레호 거리를 타고 올라가 아마 필모어 거리까지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도시의 주택가는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위험이 왔다. 잭슨 거리와 퍼시픽 거리 사이, 레븐워스 거리부터 밴네스 거리까지 또 한 줄의 블록에 불이 붙었다. 밤 10시 15분쯤이었다. 11시 15분에는 불이 밴네스 거리에 닿았고, 밴네스 거리와 잭슨 거리 모퉁이의 보틴 씨 집이 완전히 불타올랐다. 그 집은 다 타 버렸지만 불은 밴네스 거리 서쪽 편으로 건너오지 않았다. 낮부터 저녁 내내 바람은 북서쪽에서 꾸준히 불었다. 아주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밴네스 거리 서쪽 편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4월 20일 금요일 새벽, 소파에서 세 시간

20일이 시작되는 밤 12시에 스프레클스 저택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가서 소방대원에게 물었더니, 그 집에 들어가 보았는데 연기가 가득하고 불이 붙었다고 했다. 1시에 위층 방들이 불탔고, 1시 30분에는 위층 창문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전체가 불탔다. 그 집은 고로반 오두막에서 넘어온 불길이 뒤쪽 창문으로 들어와 불이 붙은 것이었다. 누구든 양동이 하나를 들고 안에서 지키고 있었다면 그 불은 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프레클스 저택이 완전히 불붙었을 때, 나는 그 집이 철골에 속이 빈 타일 칸막이, 돌 외벽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열기가 우리 집을 위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몹시 지쳤으므로 퍼거슨에게 집에 들어가 눈을 좀 붙이겠다고 했다. 그는 내가 어느 방에서 잘 것인지 묻고는, 그들이 우리 집을 폭파하려 하거나 다른 위험이 닥치면 창문을 두드려 나오라고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새벽 2시에 들어가 서재의 소파에 누웠고 5시까지 잤다. 깨어나 밖을 보니 스프레클스 저택의 모든 창문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그 집은 속까지 다 타 버렸다. (멀리서 보면 그 집의 전체 모습은 예전과 같다. 벽과 지붕이 불나기 전과 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출처

  • James B. Stetson, 『San Francisco During the Eventful Days of April, 1906: Personal Recollections』, 1906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640, https://www.gutenberg.org/ebooks/4640)
  • 미국지질조사국(USGS), 「The Great 1906 San Francisco Earthquake」 (https://earthquake.usgs.gov/earthquakes/events/1906calif/18april/)
  • 미국지질조사국(USGS), 「Casualties and damage after the 1906 Earthquake」 (https://earthquake.usgs.gov/earthquakes/events/1906calif/18april/casualties.php)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an Francisco earthquake of 1906」 (https://www.britannica.com/event/San-Francisco-earthquake-of-1906)
  •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프레시디오, 「1906 Earthquake: Fire Fighting」 (https://www.nps.gov/prsf/learn/historyculture/1906-earthquake-fire-fighting.htm)
  •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66조 (국가법령정보센터)
  • 생존주의, 『대한민국 생존주의 바이블: 재난편』 3-1, 3-2, 3-3, 9-2, 14-1, 14-2, 15-1

원문: 퍼블릭도메인(저자 1909년 사망). 번역: 생존주의 매거진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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