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1965~1975, 폭격과 피난 속 서민들은 어디에 숨고 어떻게 버텼나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시작한 1965년부터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그 뒤 보트피플까지 베트남전쟁을 여섯 단계로 나눠 남과 북의 서민들이 무엇을 했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봅니다. 민간인 피해와 난민 수는 베트남 정부, 인구학 연구,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난민기구(UNHCR) 집계를 기관·시점별로 적었습니다.

- 1배경과 확전1964.8~1965.3통킹만 결의 뒤 북베트남 폭격과 미 지상군 투입이 시작됐습니다.
- 2장기전과 폭격1965.3~1967북쪽 도시는 방공호와 소개로, 남쪽 농민은 피난과 수용소로 버텼습니다.
- 3구정 공세1968.1.30~3월설 휴전 중 남베트남 도시들이 한꺼번에 전장이 됐습니다.
- 4미군 철수와 파리 협정1969~1973.3.29철수와 협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하노이 폭격은 계속됐습니다.
- 5종전1975.3~4.30남베트남이 두 달 만에 무너졌고 사이공에서 마지막 철수가 이뤄졌습니다.
- 6종전 뒤 난민1975~1990년대작은 배로 바다를 건넌 보트피플과 합법 출국 프로그램이 이어졌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며 베트남전쟁은 끝났습니다.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과 지상군 투입을 시작한 1965년부터 따지면 10년이 걸린 전쟁이었습니다. 지상전은 주로 남베트남의 논과 마을, 도시에서 벌어졌고, 북베트남에는 하늘에서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이 글은 작전보다 남과 북의 보통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남쪽 농민은 마을을 옮기거나 도시로 피난했고, 북쪽 도시민은 길가 방공호와 시골 소개(疏開)로 폭격을 견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수십만 명이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넜습니다. 숫자는 기관과 시점을 함께 적었습니다. 같은 일을 두고도 기관마다 집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① 배경과 확전 · 1964~1965년
1954년 베트남은 공산주의 북쪽과 미국이 지원하는 남쪽으로 나뉘었습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62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아 농촌 주민을 울타리를 친 새 마을로 모으는 전략촌 사업을 벌였습니다. 게릴라와 주민을 떼어 놓으려는 계획이었지만, 브리태니커는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막을지 가려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고 강제 노동과 잦은 이주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적고 있습니다.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미 해군 함정이 공격받았다는 보고가 나오자, 미 의회는 8월 7일 대통령에게 폭넓은 군사 행동 권한을 주는 통킹만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남베트남에 있던 미군은 1964년 말 약 2만 3천 명으로 늘었고, 1965년 3월 2일 북베트남 폭격 작전 '롤링 선더'가 시작됐습니다. 3월 8일에는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남쪽 농민 가운데 많은 이가 살던 마을을 떠나 전략촌으로 옮겨야 했고, 울타리를 세우는 일에 주민 노동이 동원됐습니다. 북쪽 하노이에서는 동네와 직장마다 방공호를 파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 바뀐 것 살 곳을 스스로 정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마을 출입이 통제를 받았고, 정부와 게릴라 사이에서 누가 어느 편인지 의심받는 일이 늘었습니다.
- 버틴 방법 사람들은 정해진 마을 안에서 농사를 이어 갔습니다. 북쪽 주민들은 동네와 일터 단위로 방공호와 교통호를 함께 파며 폭격에 대비했습니다.
② 장기전과 폭격 · 1965~1967년
롤링 선더 작전은 1965년 3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노이에서는 동네와 직장마다 방공호를 팠고, 보도 밑에는 시멘트를 섞어 만든 원통을 묻은 1인용 방공호가 생겼습니다. 이런 1인용 방공호는 하노이에만 10만 개 넘게 만들어졌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로 흩어졌습니다. 하노이는 도심에 꼭 필요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를 시골로 보내는 소개를 벌였고, 아이들은 부모의 직장 단위를 따라 시골 마을로 옮겨 마을 사당 같은 곳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미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의 1966년 평가도 북베트남이 도시 인구의 상당 부분을 옮겼다고 적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농촌이 전장이 됐습니다. 폭격과 지상 작전을 피해 많은 농민이 도시 변두리와 피난민 수용소로 몰렸고, 미 상원 난민소위원회는 1965년과 1967년 남베트남 피난민과 민간인 피해 문제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미군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랜치 핸드 작전'으로 숲과 농작물에 고엽제를 비롯한 제초제를 뿌렸습니다. 미국 보훈부는 살포량을 1,900만 갤런 이상으로 적고 있고, 2003년 『네이처』에 실린 스텔먼 연구진의 재계산은 기존 추정치에 700만 리터 넘게 더해야 한다고 고쳤습니다.
이 연구는 마을 인구 자료를 바탕으로 수백만 명의 베트남 주민이 직접 살포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고, 다이옥신에 따른 건강 피해는 전쟁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하노이 사람들은 확성기 방송과 사이렌으로 적기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가까운 방공호로 내려갔습니다.
- 바뀐 것 가족이 한집에 모여 사는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는 시골에서, 부모는 도시의 일터에서 지내며 가족이 도시와 시골로 나뉘어 사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 버틴 방법 길가와 동네, 일터 곳곳에 방공호가 있어 경보가 울리면 몇 걸음 안에 몸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경보를 듣고 나서 숨을 곳을 찾지 않도록, 숨을 곳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③ 구정 공세 · 1968년
1968년 1월 30~31일 설 휴전 기간에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도시들을 한꺼번에 공격했습니다. 44개 성도 가운데 36곳, 6개 자치시 가운데 5곳, 242개 군청 소재지 가운데 64곳이 공격을 받았고,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도 표적이 됐습니다. 설 연휴를 지내던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전장이 됐습니다.
가장 오래 싸움이 이어진 곳은 옛 왕도 후에였습니다. 1월 31일부터 3월 2일까지 집과 골목을 오가는 시가전이 벌어졌고, 인구 14만 명 가운데 11만 6천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미 육군사관학교 현대전연구소와 미 해병대 박물관 자료는 점령 기간에 민간인 처형이 있었고 뒤에 집단 매장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고 적고 있으며, 희생자를 약 3,000명으로 집계합니다.
남베트남 전체로 보면 공세 기간 1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숨졌고, 수십만 명이 새로 피난민이 됐습니다. 정확한 수는 집계한 기관과 역사학자마다 다릅니다.
- 그때 서민들은 도시 주민들은 총격이 멎기를 기다리며 집 안에 머물거나, 싸움이 붙은 구역을 빠져나와 임시 수용소로 옮겼습니다.
- 바뀐 것 도시는 안전하다는 믿음이 깨졌습니다. 전쟁 내내 쌓인 피난민 위에 새 피난민이 더해졌고, 집을 잃은 도시민도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 버틴 방법 싸움이 잦아든 틈에 위험한 구역을 벗어나 수용소에서 배급을 받으며 복구를 기다렸습니다. 공격이 설 휴전 중에 시작됐다는 사실은 휴전 기간이라고 경계를 풀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줬습니다.
④ 미군 철수와 파리 협정 · 1969~1973년
미군은 1969년 봄 50만 명이 넘는 규모로 가장 많았고, 그해부터 철수와 '베트남화'가 시작됐습니다. 파리 협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폭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2년 폭격이 다시 거세지자 하노이 거리에는 다시 1인용 방공호가 늘어섰습니다.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B-52 폭격기가 하노이와 하이퐁을 집중 폭격했습니다(라인배커 II 작전). 폭격 직전 긴급 소개령이 내려져 하노이 도심 거리는 텅 비었고, 도시에는 지휘 기관과 방공 부대, 꼭 필요한 일터만 남았습니다. 북베트남 공식 집계로 이 기간 민간인 사망자는 1,624명 이상입니다.
성탄절에 폭격이 멈춘다는 소식에 소개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월 26일 밤 노동자 동네인 캄티엔 거리가 폭격을 맞아 280명 안팎(베트남 신문 집계 278~287명)이 숨지고 2,000채 안팎의 집이 무너졌습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이 조인됐고, 3월 29일 마지막 미군 부대가 베트남을 떠났습니다. 남과 북 사이의 싸움은 협정 뒤에도 곧 다시 이어졌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하노이 사람들은 소개령이 다시 내려지자 아이와 노인부터 시골로 보냈습니다. 경보가 울리면 집 앞과 동네의 방공호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 바뀐 것 협상 소식과 폭격이 번갈아 왔습니다. 평화가 가깝다는 뉴스가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 버틴 방법 경보가 울리면 집 앞과 동네의 방공호로 곧장 들어갔고, 아이와 노인은 소개지에 머물렀습니다. 폭격이 멈췄다는 소식만으로 소개지를 떠나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⑤ 종전 · 1975년
1975년 3월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남베트남 정부와 군은 두 달이 안 돼 무너졌습니다. 중부 고원과 후에, 다낭에서 물러나는 군과 함께 피난민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습니다.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는 4월 28일 포격으로 막히기 전까지 고정익 항공기로 5만 명 넘게 빠져나갔습니다. 공항이 막힌 뒤 4월 29~30일 헬리콥터 철수(프리퀀트 윈드 작전)로 미국인 1,373명과 베트남인·제3국인 5,595명이 실려 나갔습니다.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했고, 북베트남군은 큰 시가전 없이 사이공에 들어왔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서 미 해군 함정에 구조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1975년 한 해 미국의 보호 아래 들어온 베트남 피난민은 약 13만~14만 명으로 집계됩니다.
- 그때 서민들은 미국 기관에서 일했거나 남베트남 정부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공항과 대사관으로 몰렸습니다. 떠나기를 원했지만 철수 시간 안에 나가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 바뀐 것 공항이 막히는 순간 탈출 경로는 헬리콥터 몇 대와 바다만 남았습니다. 하늘길이 열려 있던 몇 주가 실제로 떠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버틴 방법 대다수 주민은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물렀고, 사이공은 큰 시가전 없이 넘어갔습니다. 떠날 길이 닫힌 뒤에는 집 안에서 상황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남은 선택이었습니다.
⑥ 종전 뒤 난민 · 1975~1990년대
UNHCR 『세계 난민 현황 2000』은 1975년 이후 20년 동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에서 3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나라를 떠났다고 적습니다. 베트남에서는 1978년부터 작은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보트피플'이 크게 늘었고, 1979년 6월 한 달에만 5만 4천 명이 넘게 주변국에 닿았습니다.
1975~1995년 주변국과 홍콩 등에 닿은 보트피플은 79만 6,310명이고, 1997년까지로 넓히면 83만 9,228명이 UNHCR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해적과 폭풍, 과밀한 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1979년 5월 UNHCR과 베트남 정부는 배를 타지 않고 합법적으로 출국하는 '질서 있는 출국 프로그램'에 합의했습니다. 이 길로 1997년까지 50만 명이 넘게 나라를 떠났습니다. 1989년부터는 '포괄적 행동계획'으로 새로 도착한 사람을 심사해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돌려보냈고, 이 기간 10만 9천 명 넘게 귀국했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작은 어선 한 척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가 낡고 사람이 넘쳐 해안 가까이에서 가라앉는 일도 있었습니다.
- 바뀐 것 주변국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6월 말 아세안 회원국들은 더는 새 도착자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고, 배를 바다로 되밀어 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 버틴 방법 바다를 건넌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심사를 거쳐 제3국 정착을 기다렸습니다. 먼저 정착한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족 재결합을 이유로 한 합법 출국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은 것
베트남전쟁의 서민 기록에는 지금도 쓸 수 있는 장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노이는 경보 뒤에 숨을 곳을 찾지 않도록 길가와 동네, 일터 곳곳에 방공호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캄티엔의 밤은 폭격이 멈췄다는 소식이 곧 안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종전 뒤에는 먼저 자리 잡은 가족이 남은 가족에게 합법 출국의 길을 열어 줬습니다.
고엽제 피해처럼 전쟁의 영향은 총성이 멎은 뒤에도 수십 년 남습니다. 무기와 통신은 그때와 다르지만, 대피 자리를 미리 정하고, 해제 안내를 확인하고, 서류와 연락 수단을 챙기는 일은 오늘 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 집과 직장(학교), 통근길 세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피소까지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으로, 배낭을 메고 걸어 보며 걸리는 시간을 재 둡니다.
- 공습경보가 울리면 가까운 지하시설이나 콘크리트 건물의 유리창 없는 곳으로 가고, 엘리베이터는 쓰지 않습니다. 집중 호우 시기에는 침수에 약한 저지대 지하를 피합니다.
- 경보해제나 공격 중단 소식만 듣고 귀가하거나 가족 합류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정부의 후속 안내를 확인한 뒤 움직입니다.
- 건전지로 켜지는 라디오와 여분 건전지를 두고,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의 우리 지역 라디오 주파수를 적어 둡니다.
- 생존배낭에 신분증과 통장, 보험증서 같은 중요 서류, 가족 비상연락카드를 넣고, 흩어졌을 때 만날 1차·2차 집결지를 가족과 정해 둡니다.
- 노인이나 아이, 거동이 불편한 가족이 고층에 있다면 경계경보 단계에서 미리 저층이나 대피소로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계단을 내려오는 데 가장 오래 걸리는 사람을 기준으로 시간을 잽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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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주의 매거진 팀, 『대한민국 생존주의 바이블: 전쟁편』·『기본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