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950~1953, 피난길의 서민들은 무엇을 들고 어떻게 버텼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까지, 6·25 전쟁을 여섯 단계로 나눠 그때 서민들이 무엇을 했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봅니다. 피난민 수와 민간인 피해는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집계를 기관·시점별로 적었습니다.

- 1개전과 서울 함락1950.6.25~6.28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한강 인도교가 끊겼습니다.
- 2낙동강까지 피난1950.7~9.14피난민이 남쪽 도시로 몰리고 정부는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 3인천상륙과 북진1950.9.15~11월서울을 되찾았고 남은 사람들은 무너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4중공군 개입과 1·4 후퇴1950.10.25~1951.3흥남 철수와 1·4 후퇴로 두 번째 대규모 피난이 일어났습니다.
- 5전선 고착과 휴전 협상1951.7.10~1953.7부산 판자촌과 천막 학교에서 2년 넘게 피란살이가 이어졌습니다.
- 6휴전과 복구1953.7.27 이후총성은 멎었지만 흩어진 가족과 무너진 집이 남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전투는 남쪽 낙동강부터 북쪽 압록강까지 한반도의 약 80%에 이르는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글은 작전보다 그 땅에 살던 보통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언제 떠났고, 무엇을 들고 갔으며, 어디서 어떻게 버텼는지를 여섯 단계로 나눠 봅니다. 숫자는 기관과 시점을 함께 적었습니다. 같은 일을 두고도 기관마다 집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① 개전과 서울 함락 · 1950년 6월
북한군은 서쪽 옹진반도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까지 38도선 전역에서 동시에 넘어왔습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과 춘천, 강릉을 점령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였습니다.
같은 날 새벽 2시 30분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습니다. 주민에게 미리 알린 공지는 없었습니다. 다리 위의 희생 규모는 기록마다 달라 지금도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 뒤 서울에 남은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 주된 길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 그때 서민들은 끊긴 다리 앞에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배 같은 다른 수단이 있었지만, 대규모 피난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 바뀐 것 서울을 오가는 길이 하룻밤 사이에 끊겼습니다. 강 건너 목적지로 가려던 계획은 그 순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 버틴 방법 배를 구한 일부는 강을 건넜고,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석 달 뒤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점령된 도시에서 지냈습니다.
② 낙동강까지 피난 · 1950년 7~9월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을 벌이며 내려가 8월 1일 마산과 왜관, 영덕을 잇는 낙동강선까지 물러났습니다. 정부는 6월 27일 대전, 7월 16일 대구를 거쳐 8월 18일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부산시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1,023일을 피란수도 기간으로 기록합니다.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리자 7월에는 대전이 포화 상태가 됐습니다. 정부는 7월 관계 부처 장관 명의 통첩(관보 제384호)으로 피난민을 충청·전라·경상 각 도에 나눠 수용하라고 지시했고, 수용소 관리와 함께 피난민 증명서 교부를 맡겼습니다.
증명서에는 본적지와 피난 전 사는 곳, 이름, 성별, 나이, 직업을 적었고, 군과 경찰, 사회부의 지시를 따르라는 문구도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에는 피난민이 피해를 입은 일도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충북 영동 노근리 일대에서 피난민이 미군에 의해 희생됐고, 국회는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희생자 심사와 명예회복을 맡겼습니다.
전쟁 전후 군경, 북한군과 빨치산 같은 적대세력, 미군 폭격으로 비무장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들은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걷거나 수레를 끌고, 배나 화물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갔습니다. 증명서를 받은 사람은 정해진 수용소로 가고, 행선지까지도 계획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 바뀐 것 증명서 없이 다니는 것이 위험해졌습니다. 당시 신분증명서는 시민증·도민증·거주증명서·피난민증 등 여러 가지였고, 늘 들고 다니며 검문에 응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 버틴 방법 사람들은 증명서를 몸에서 떼지 않았고, 구호 당국이 정한 길과 수용소를 따랐습니다. 통제선 앞에서는 규칙을 아는 사람이 덜 다쳤습니다.
③ 인천상륙·서울 수복·북진 · 1950년 9~11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고, 다음 날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이 이어졌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서울을 함락 90일 만에 되찾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10월 1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했고,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했습니다.
37도선과 38도선 사이 지역은 전쟁 동안 세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집과 다리, 학교가 부서졌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시민은 무너진 집을 마주했고, 점령 기간에 누가 무엇을 했는지 따지는 심사도 시작됐습니다. 1951년 경찰서장 명의로 발급된 '양민 심사증' 같은 서류가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피난지에서 서울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남았던 사람과 떠났던 사람이 다시 만나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습니다.
- 바뀐 것 신분을 증명하는 일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신분증은 식량 배급의 기본 요건이었고, 시민증을 받지 못하면 이동과 배급에서 막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버틴 방법 사람들은 증명서를 다시 받는 일부터 했고, 부서진 집을 고쳐 들어갔습니다. 서류는 늘 몸에 지니고 검문에 응했습니다.
④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 1950년 10월~1951년 3월
10월 25일 청천강 북쪽에서 중공군의 기습이 시작됐고, 11월 말 대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물러났습니다. 동부전선에서는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바다로 철수했습니다. 미 육군 기록은 흥남과 원산, 성진에서 배로 남쪽에 옮겨진 민간인을 약 9만 8천 명으로 적고 있고,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한 척에만 약 1만 4천 명이 탔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됐습니다. 국방부 『한국전란 1년지』는 1951년 3월 피난민을 6,514,582명으로 집계했습니다. 1949년 인구총조사 기준 남한 인구 약 2천만 명의 3분의 1에 가까운 규모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찾았습니다.
정부는 피난길도 미리 그었습니다. 1950년 12월 15일 사회부가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피난민 통로 약도는 길을 제1·2·3코스로 나눴는데, 제1코스는 수색에서 소사와 발안을 지나 평택, 둔포로 이어졌습니다. 피난민은 정해진 도로를 따라 각 지방의 수용 예정지로 향했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한겨울에 걷거나 화물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갔습니다. 서울에서 마포 쪽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 행렬이 국가기록원 영상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랐고 추위가 가장 큰 고생이었습니다.
- 바뀐 것 주요 도로는 유엔군이 통제해, 피난민은 대개 보조 도로와 산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 버틴 방법 흥남 부두의 피난민은 백 명 단위로 묶여 조사를 받고 식량과 물을 받으며 배를 기다렸습니다. 유엔이 보낸 구호품은 천막과 모포, 내의, 양말, 비누, 분유, 양곡, 소금처럼 당장 몸을 지키는 물건부터였습니다.
⑤ 전선 고착과 휴전 협상 · 1951~1953년
1951년 6월부터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굳어졌고,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습니다. 회담은 군사분계선과 포로 교환 문제로 2년을 끌었고, 그동안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부산의 피란살이는 이 2년 동안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부와 부산시는 극장과 공장, 여관까지 수용시설로 썼지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일부였습니다. 나머지는 산비탈과 해안가에 판자와 거적으로 집을 지었고, 용두산과 복병산,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영도 바닷가가 판잣집으로 채워졌습니다. 국제시장 같은 큰 시장 근처가 특히 붐볐습니다.
학교도 피란지에서 다시 열렸습니다. 문교부는 1951년 1월 20일 통첩으로 피난 학생을 피난지 학교에 등록해 수업받게 했고, 2월에는 「전시하 교육 특별조치요강」을 내 천막과 노천에서라도 수업을 잇게 했습니다. 서울을 다시 찾은 뒤에도 민간인의 서울 출입은 통제되어, 한강을 건너려면 도강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판잣집과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산자락 천막 교실에서 돌을 깔고 앉아 수업을 들었고, 학생들이 닭을 치고 계란을 팔아 학교 살림을 돕기도 했습니다.
- 바뀐 것 판잣집 동네에는 교통과 위생, 상수도 문제가 늘 따라다녔고, 불이 나면 크게 번졌습니다. 전선이 굳자 남쪽 출신 피난민 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쪽 출신 피난민은 부산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 버틴 방법 셋방조차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공터와 산비탈을 다듬어 스스로 집을 지었습니다. 학교가 열리자 피난민들은 형편이 어려워도 아이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⑥ 휴전과 복구 · 1953년 7월 이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됐고, 그날 밤 10시를 기해 전투가 멈췄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생겼습니다. 정전협정이었을 뿐 평화조약은 지금까지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피해는 컸습니다. 내무부 통계국의 1955년 집계로 남한 민간인 사망은 244,663명, 학살 128,936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입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통계자료집』(2023)은 국군 전사·사망을 138,418명으로 적고 있습니다. 1953년 4월에도 피난민은 2,611,328명이었습니다.
복구는 원조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유엔은 1950년 12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세웠고, 이 기구는 긴급 구호부터 주택·학교·의료 시설 재건, 공장 건설까지 지원했습니다. 흩어진 가족 찾기는 훨씬 오래 걸렸습니다.
남북 당국 간 상봉 행사는 2000년부터 21차례 열려 남북한 4,912가족 24,509명이 대면 또는 화상으로 만났지만, 2018년 8월 이후 멈춰 있습니다(통일부).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는 138일 동안 100,952건의 신청이 들어와 10,189건이 만났고, 이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습니다.
- 그때 서민들은 피란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갈 곳이 없으면 피란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산 아미동처럼 피난민이 산기슭에 지은 집들은 그대로 동네가 됐습니다.
- 바뀐 것 행방불명 30만 명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듯, 많은 가족이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살게 됐습니다. 통일부 이산가족정보 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찾기 신청자는 2026년 7월 말 기준 134,819명이고, 그 가운데 101,672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 버틴 방법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가족을 찾았고, 1983년 방송에는 넉 달 넘게 사연이 이어졌습니다. 흩어진 뒤에는 서로를 찾을 방법이 없어, 다시 만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은 것
6·25 전쟁의 피난 기록에는 지금도 같은 조건 세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강과 다리는 피난길이면서 가장 먼저 끊기는 곳이었습니다. 군의 통제선 앞에서는 규칙을 모르는 피난민이 위험해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흩어진 가족은 다시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기와 도로, 통신은 그때와 다릅니다. 이 기록은 예측이 아니라 준비할 지점을 보여줍니다. 다리가 끊길 수 있다는 전제로 목적지를 정하고, 신분증과 사본을 나눠 두고, 연락카드 한 장과 만남의 장소 두 곳을 정해 두는 일은 오늘 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 가족 비상연락카드를 종이로 만들어 각자 지닙니다. 집결지 1차·2차·3차와 다른 지역에 사는 연락 담당자 한 명을 적어 두면, 흩어졌을 때 서로를 찾을 길이 남습니다.
- 피난 목적지가 강 건너라면 일찍 움직이거나 목적지에서 빼 둡니다. 6·25 때 다리는 사전 공지 없이 끊겼습니다.
- 실물 신분증을 챙기고, 사본 한 부를 원본과 다른 곳에 둡니다. 휴대전화가 꺼지면 모바일 신분증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 검문소와 통제구역 규칙을 미리 알아 두고, 현장에서는 우회하지 않고 지시에 따릅니다.
- 땅에서 오래된 포탄이나 폭발물을 보면 만지거나 옮기지 말고 위치만 군부대나 112에 알립니다.
- 현금은 한곳에 몰지 말고 나누어 둡니다. 통신과 금융망이 멈추면 계좌의 돈을 바로 꺼내 쓸 수 없습니다.
출처
- 국가기록원, 「6·25전쟁: 전쟁 속의 통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통계자료집』 2023, 국방부 『한국전란 1년지』 1951·『한국전란 3년지』 1954, 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5 인용)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damageStatistic.do)
- 국가기록원, 「6·25전쟁: 전선의 변화」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process/frontline.do)
- 국가기록원, 「국가기록물로 보는 6.25전쟁 중 피난생활」, Google Arts & Culture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tgVB5KsC_5i-EQ)
- 국가기록원, 「한국의 전후 복구와 재건」, Google Arts & Culture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PgWhQHNznHCRZA)
- 임시수도기념관, 「부산으로의 피란과 피란민의 일상」, Google Arts & Culture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VAWhRi6GdoAXLg)
- 부산광역시, 「1023일 피란수도 부산, 그 가치를 재조명하다」 (https://www.busan.go.kr/news/totalnews01/view?dataNo=59034)
- 서울특별시중부교육지원청 중부교육디지털박물관, 「월간 중부기록 6월: 전쟁과 학교」 (https://jbarchives.sen.go.kr/exhibits/show/c2023-1/c2023-1-4)
-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윤소라, 「6.25전쟁과 신분 증명」
- United Nations Command, 「1950-1953: Korean War (Active Conflict)」 (https://www.unc.mil/History/1950-1953-Korean-War-Active-Conflict)
- ARSOF History(미 육군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The Refugee Evacuation from Hungnam: 9-24 December 1950」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7n1_hungnam_page_1.html)
- Guinness World Records, 「Largest evacuation from land by a single ship」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largest-evacuation-from-land-by-a-single-ship)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한국전쟁 민간인희생 특별페이지」 (https://jinsil.go.kr/KoreanWar.do)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https://heritage.unesco.or.kr/)
- 통일부, 「이산가족 개관」 (https://www.unikorea.go.kr/web/unikorea/contents/reunion_current)
- 연합뉴스, 「숫자로 본 6·25 전쟁…국군 사망자 13만7천899명」, 2015-06-24 (https://www.yna.co.kr/view/AKR20150624129751043)
- 국가법령정보센터,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진, 「이산가족」 (https://www.acc.go.kr/webzine/index.do?article=908&lang=ko)
-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토픽: 이산가족 이야기」 (https://theme.archives.go.kr/next/slogan/Gallery.do?type=1¶m=04)
- 국가기록원, 「인구정책: 연도별 인구 통계」 (https://theme.archives.go.kr/next/populationPolicy/statisticsPopup_01.do)